'뷰마스터(View-Master)'를 아시나요? 뷰마스터는 둥근 이야기 카트리지를 위쪽에 꽂고 두 눈을 갖다 데면 마치 영화 극장에 온 듯 놀라운(?) 화면이 펼쳐집니다. 마치 가상현실 헤드셋처럼 생겼죠. 오른쪽 위에 달린 하늘색 레버를 아래로 내리면 다음 화면으로 넘어갑니다.
초등학교 시절 학교 앞 노점상에서 이 뷰마스터를 통해 처음 접한 위대한 동화가 있었는데, 바로 ‘행복한 왕자’였습니다. 뷰마스터라는 것 자체가 생소했고, 이를 통해 본 ‘행복한 왕자’의 스토리가 너무 감동적이어서 아직까지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 ‘행복한 왕자(The Happy Prince, 1888)’를 쓴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작가입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 1890)’은 그가 쓴 유일한 장편 소설이죠.
2003년. '젠틀맨 리그(The League of Extraordinary Gentlemen)’라는 액션 영화에서 바로 이 ‘도리언 그레이’가 반전의 중심에 선 악역으로 나옵니다. 주인공들이 영화 제목 그대로 매우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의 모임이었죠. 이들 무리 중 한 사람이 불사신의 능력을 가진 도리언 그레이였습니다. 빗발치는 총탄을 맞고도 꿈적하지 않은 도리언 그레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가슴에 칼이 찔린 상황에서 자신 대신 늙어가고 흉측해져 가는 자신의 초상화를 보게 됨으로써, 초상화와 젊고 잘생긴 자신의 모습이 바뀌는 운명을 맞고,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최후를 맞습니다. 영화 포스터 맨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죠.
2009년에 ‘도리언 그레이’가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5월에야 개봉되었는데, 흥행에는 실패한 것 같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보다 드라마틱한 스토리로 재창조되었죠.
도리언 그레이 역은 영화 ‘나니아 연대기: 캐스피언 왕자(2008)’와 ‘나니아 연대기: 새벽출정호의 항해(2010)’에서 소위 ‘꽃미남’ 캐스피언 왕자로 나왔던 벤 반스(Ben Barnes)가, 그를 파멸의 길로 부추긴 '헨리 워튼' 경 역은 영국의 유명한 연기파 배우 콜린 퍼스(Colin Firth)가 맡았습니다.
영화는 도리언 그레이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 바질 홀워드를 살해한 후 그 시체를 담았던 여행용 가방을 강물에 버리는 충격적인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왜 그런 사건이 생겼는지 1년 전 상황으로 돌아갑니다. 이제 원작 소설과는 다르게 각색된 영화 '도리언 그레이(2009)'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도리언 그레이는 할아버지 사망 이후 할아버지의 대저택이 있는 런던으로 입성합니다. 그 곳에서 피아노 독주회를 여는데 화가인 바질 홀워드가 그의 빼어난 외모를 흠모하게 되고, 마침내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원인인 도리언의 초상화를 그립니다. 너무나 초상화가 완벽하게 그려져서 도리언은 영혼을 팔아서라도 평생 초상화처럼 영원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자 원합니다. 이게 화근이 됩니다. 그의 뜻대로 이루어진 거죠.
한편, 바질의 친구인 헨리는 특유의 입담으로 도리언에게 접근하고 그를 점점 타락의 길로 빠뜨리죠. 그가 타락할수록 도리언의 초상화는 신기하게도 점점 험상궂은 모습으로 변해갑니다. 점점 타락해가는 도리언은 연인이었던 연극 배우 '시빌 베인'을 버리게 되고, 끝내 그녀를 자살하게 만듭니다. 이 사건으로 도리언은 심한 충격을 받고 더욱더 깊은 나락의 길을 걷죠. 마침내, 그의 초상화를 그린 바질을 살해하고 그 시체를 강물에 유기합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그는 여전히 초상화가 처음 그려졌을 당시의 젊음을 계속 유지합니다. 그와 육체적인 사랑을 나눴던 수많은 여인들도 이제 모두 할머니가 됩니다. 이제야 사람들은 비로서 그에게 뭔가 비밀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도리언의 비밀을 밝히고자 집요하게 추적한 헨리가 마침내 그 비밀인 그레이의 초상화의 베일을 걷고, 괴물로 변한 초상화에게 불을 던집니다. 그리고 나서, 헨리는 그레이의 마지막 연인이 된 자신의 딸을 현장에서 발견하고 함께 도망갑니다.
▲ Ivan Albright(1897-1983)의 작품
도리언은 불타는 자신의 초상화의 가슴에 칼을 꽂는데, 그 순간 자신은 초상화의 흉측한 모습으로 변하고 결국 도리언 그레이는 불에 타서 죽습니다. 영화는 헨리가 도리언의 집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화를 확인하면서 막을 내립니다.
이 영화를 보기 전에 오스카 와일드의 원작 소설을 먼저 읽었는데요. 원작은 스토리 중심이라기 보다는 주로 도리언, 헨리, 바질의 장황한 대화가 주를 이룹니다. 특히, 오스카 와일드의 유미주의자 다운 묘사들이 압권입니다. 영화와는 많은 부분 차이가 있는데요. 예를 들면, 도리언이 바질의 시체를 화학물질 전문가에게 의뢰하여 살해 현장에서 완전히 사라지도록 처리합니다. 또한, 헨리의 딸과 로맨스도 없고요. 결정적인 차이는 도리언의 초상화에 담긴 비밀은 그가 자신의 초상화에 칼을 꽂고 죽기 전까지 오직 그 자신만 압니다. 초상화가 불타는 사건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야기 내용만 보면 오스카 와일드가 '행복한 왕자'의 작가라고는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이 소설은 매우 특이하게도 작가의 머리말이 있는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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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것에서 아름다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은 교양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있다. 그들은 선택 받은 사람들로, 그들에게 아름다운 것은 오롯이 아름다움만을 의미한다. 도덕적인 책이나 부도덕한 책은 없다. 잘 쓴 책, 혹은 잘 쓰지 못한 핵, 이 둘 중 하나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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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미는 무엇일까요? 원래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책으로 출판하지 않았답니다. 1890년에 '리핀코츠 월간지(Lippincott's Monthly Magazine)' 7월호에 처음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발표 당시 언론과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는데요, 내용이 음란하고 퇴폐적이며, 동성애적 요소까지 들어있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에 반발했지만 끝내 뜻을 굽히고 이듬해 내용을 대폭 수정하여 한 권의 책으로 출판했고, 그 서문에 위와 같은 내용을 담았던 것이죠.
아일랜드 더블린에 있는 메리온 광장 공원(Merrion Square Park)에 바위에 앉아 있는 와일드의 조각상이 있습니다. 의상의 색깔이 매우 다채로운데요. 분홍색 칼라가 압권입니다. 특히 분홍색이 남자 동성애자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오스카 와일드는 잘 알려진, 지팡이를 짚고 독특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사진에서 느껴지는 '포스'와 같이 젊은 날에 기이한 행동을 즐겼다고 합니다. 특이한 옷들을 즐겨 입었고, 예쁜 꽃도 꽂고 다녔다고 하네요. 현재에도 눈에 확 들어올 텐데, 19세기에 그런 스타일은 가히 충격적일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19세기 말 영국에서는 동성애가 법으로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인인 알프레드 더글러스 경(卿)(Lord Alfred Douglas)과 동성애 관계를 가졌으며, 이 일로 더글러스 경의 아버지인 퀸스베리 후작(Marquees of Queensberry)으로부터 소송을 당했습니다. 결국, 패소하여 2년 실행을 받았습니다. 이후 프랑스에 추방되었고, 파리의 한 호텔에서 뇌수막염으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혹시, '사랑해, 파리(Paris, Je T'Aime, 2006)'라는 옴니버스식 영화를 보셨는지요. 파리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남녀들의 평범하지만 의미 있는 사랑 이야기들이 인상 깊습니다. 그 중 파리에 있는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을 배경으로 한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은 위와 같이 좀 특이합니다. 거대한 앗시리아 양식의 천사가 조각되어 있는데요. 수많은 낙서와 립스틱 키스 자국들이 한 세기 전에 잠든 위대한 작가에 대한 경의를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영화 '사랑해, 파리'의 한 에피소드에서 결혼을 앞둔 한 커플이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남자는 감성이 메마르고 유머 감각도 없는 캐릭터이고, 여자는 감성이 풍부한 캐릭터로 오스카 와일드가 자신을 웃게 해줬다며, 그의 무덤에 키스 자국을 남깁니다. 남자는 어의 없어하고 여자는 삐쳐서 남자를 두고 혼자 무덤을 떠납니다. 이 때, 남자가 넘어져서 머리를 무덤에 부딪히는데, 오스카 와일드의 유령이 눈앞에 나타납니다. 그 여자를 꼭 잡으라고 조언하죠. 남자는 여자에게 달려가 키스하고 진심을 담아 미안하다고 합니다. 둘은 금새 화해하고 다음 여정을 함께하죠.
이처럼 위대한 작가는 세기를 뛰어 넘어 수많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고, 삶에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그 스토리 자체도 독특하고 탁월하지만, 예술의 세계와 실질적인 삶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인간을, 이상과 현실이라는 타협할 수 없는 양극단에서 이 모두를 어떻게 해서든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그렸다고 봅니다.
이상만을 추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현실만을 추구하는 것은 왠지 후회가 많을 것 같은 우리의 삶,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상과 현실의 적절한(?) 조화를 추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것은 둘 다 추구하지 않은 그저 그런 삶을 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다음에는 하드보일드 탐정소설의 창시자인 대실 해밋(Dashiell Hammett)의 '몰타의 매(The Maltese Falcon)'를 다루겠습니다. 이 소설은 1941년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가 출연한 영화로 만들어져 필름 느와르(Film Noir)의 고전이 되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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