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 관계, 불륜, 출생의 비밀.
TV 드라마, 영화에 단골로 나오는 이야기의 핵심 플롯입니다. 그 중에서 ‘삼각 관계’는 소위 로맨스가 있는 이야기에서는 거의 빠지지 않죠.
‘삼각 관계’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희곡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노르웨이의 세계적인 극작가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1828-1906)이라고 합니다. 그의 희곡 ‘헤다가블레르(Hedda Gabler, 1890)’에 ‘리히텐베르그의 행복한 삼각형’이라는 표현이 나온다는데요. 이 삼각형은 남편, 아내, 정부(情婦)로 이루어져 있고, ‘남편의 입장에서 행복한(?)’의 의미라고 합니다.
일반적인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삼각 관계’는 부유하지만 사악하고 여자를 자신의 소유물로 보는 남자와 가난하지만 착하고 진정으로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름답지만 가련한 여자의 구도입니다. 대개의 경우, 여자는 진정한 사랑을 찾고, 사악한 남자는 어떤 형태로든 파멸의 길을 걷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하죠.
이번에 다루는 고전은 이러한 삼각 관계를 근간으로 한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 1925)’입니다. 특히, 지난 5월 16일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개츠비로 열연한 영화가 개봉되어 개봉한 지 약 한 달이 지난 현재 약 140만 관객을 돌파했다고 합니다.
영화를 봤다는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대체로 ‘기대에 비해 별로’라 하더군요. 그래도 화려한 파티와 의상, 휘황찬란한 대저택, 자동차 질주씬 등은 볼만 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한 번 볼 요량으로 먼저 원작 소설을 읽고 영화를 봤습니다.
원작 소설에서 전체 스토리 라인을 최대한 살리면서 한 장면 장면을 그야말로 생생하게 제 눈앞에 펼쳐놓았다고 느꼈습니다. 바즈 루어만 감독은 화려한 뮤지컬 영화 ‘물랑루즈(2001)’에서와 같이 1920년대 물질적 풍요로 가득 찬, 술에 취해 재즈 음악에 취해 흥청망청 비틀거리는 미국 뉴욕 일대의 모습을 현재를 보듯 잘 그려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는 제목 그대로 개츠비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를 개츠비의 이웃인 닉 캐러웨이가 들려주는 형식입니다. 닉은 미국 중서부 시골 출신으로 명문 예일대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입성합니다. 채권 브로커가 그의 직업이죠. 미국 동부 롱아일랜드의 한적한 곳에 집을 임대하여 사는데, 바로 옆집 주인이 그 위대한 ‘개츠비’입니다. 개츠비는 그의 대저택에서 매주 주말에 그야말로 초호화 파티를 엽니다. 지역의 대부분의 이름께나 하는 사람들, 선남선녀들이 어김없이 오죠.
그가 파티를 여는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오래 전 연인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서죠. 롱아일랜드에는 크고 작은 만(灣)들이 많습니다. 개츠비가 사는 웨스트 에그(소설 상의 가상의 지역)의 바다 건너 이스트 에그에는 데이지가 남편인 거부(巨富) 톰 뷰케넌과 개츠비의 집을 능가하는 대저택에 살고 있습니다.
개츠비는 매일 밤 저택 앞 바닷가에 서서 건너편 이스트 에그의 데이지의 저택 앞에서 깜박거리는 초록색 등대 불빛을 지켜보는 것이 유일한 낙입니다. 초록 등댓불을 손으로 만지며 데이지와 조우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공교롭게도 이웃이자 이 이야기의 화자(話者)인 ‘닉’의 사촌이 바로 데이지였습니다. 데이지의 남편인 톰 뷰캐넌은 닉과 같은 대학 친구였고요.
한편, 톰 뷰캐넌은 시내의 자동차 정비소의 조지 윌슨의 아내인 머틀 윌슨과 불륜 관계에 있습니다. 이 사실은 친구인 닉에게 자랑하듯 알려줍니다. 톰은 닉을 자신의 불륜 현장에 버젓이 데려가는 과감함을 보입니다. 1920년대 1차 대전 직후 급성장한 미국의 물질적 풍요와 이에 따른 정신적 타락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정리하면 아래와 같은 소위 ‘이중 삼각 관계’가 형성됨을 알 수 있습니다.
개츠비에 대해 잠시 소개할 필요가 있겠군요. 개츠비는 노스 다코다(North Dakota) 출신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서 원래 이름은 ‘제임스 개츠’입니다. 17세였던 어느 날 바다에서 대부호인 ‘댄 코리’를 구해줌으로써 인연을 맺고 그 후 그의 심복이 되어 부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걷습니다. 이름도 ‘제이 개츠비’로 바꿉니다. 1차 대전이 발발하여 참전하게 된 개츠비. 훈련병이었던 그가 우연한 기회에 데이지를 만나고 둘은 금새 사랑에 빠집니다. 1차 대전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고, 데이지와 연락이 끊깁니다. 그 동안 데이지는 거부 톰 뷰캐넌과 결혼합니다. 이를 안 개츠비는 악착같이 큰 돈을 벌어들여 마침내 데이지의 집 건너 편에 대저택에 입성하고, 데이지와의 재회를 꿈꿉니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와서, 닉은 개츠비와 사촌의 데이지의 운명적 재회를 잊는 징검다리 역할을 합니다. 개츠비와의 재회에 어쩔 줄 모르는 데이지. 이를 개기로 개츠비와 데이지는 개츠비의 대저택에서 사랑의 불꽃을 다시 지핍니다. 개츠비는 톰과 이별을 종용하지만, 데이지에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들의 극적인 만남은 점점 파국의 길로 접어듭니다.
톰도 개츠비와 데이지의 관계를 점점 눈치채고, 어느 무더운 여름날 톰의 제안으로 데이지와 개츠비, 닉 그리고 데이지의 친구인 여자 골프 선수 조던 베이커는 뉴욕 시내의 프라자 호텔로 피서 여행을 떠납니다. 개츠비의 노란색 롤스로이스와 톰의 파란색 승용차가 경주하듯 질주하는데, 영화에서 그 진동이 느껴지는 듯한 우렁찬 굉음과 역동적인 비쥬얼로 그려집니다.
호텔에 모인 그들. 톰은 개츠비의 정체에 대해 캐묻고 마이어 울프심이라는 밀주제조업자와 한통속이라고 폭로합니다. 더욱이, 데이지와 개츠비와의 관계를 추궁하고, 개츠비도 데이지와의 관계를 밝힙니다. 이 과정에서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톰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을 종용하는데, 난처한 데이지는 ‘둘 다 사랑한다’는 뜻을 비칩니다. 이 말에 충격 받은 개츠비는 이성을 잃고, 호텔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이 혼란에서 빠져 나오고자 호텔을 나옵니다.
개츠비와 데이지가 같은 차를 타고 갑니다. 톰은 자신에 대한 데이지의 사랑을 확인했으니, 별일 없을 것이라고 여긴 거죠. 그 과정에서 데이지가 몰던 차가 교통사고를 내고 사람을 치는데, 그 희생자가 공교롭게도 톰의 정부였던 머틀 윌슨입니다. 개츠비는 데이지의 사고를 덮기로 작정합니다. 한편, 아내의 부정의 낌새를 느꼈던 머틀 윌슨의 남편 조지 윌슨은 톰 뷰캐넌으로부터 사고 당시 자동차가 개츠비의 차임을 전해 듣고, 개츠비의 저택으로 향합니다. 그 곳에서 유유히 수영을 즐기던 개츠비를 총으로 죽이고, 자신도 자살합니다. 이제 위에서 본 ‘이중 삼각 관계’의 당사자들 중 톰과 데이지만 살아남게 되죠.
개츠비의 장례식은 쓸쓸히 치러지고, 톰과 데이지는 이스트 에그를 떠납니다. 닉도 뉴욕 생활을 접고 고향인 중서부로 돌아갑니다.
사실 개츠비의 삶의 이유 자체였던 데이지라는 여성은 1920년대의 물질만능주의, 속물주의의 전형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사회통념적으로 볼 때, 개츠비가 모든 인생을 걸 만한 여성은 아니었다고 볼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츠비는 마지막 순간까지 데이지에 대한 변함없는 순정을 바쳤던 겁니다. 물론 개츠비의 편집광적인 면이 궁극적인 파국을 이끄는 빌미를 준 점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요.
‘위대한 개츠비’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가장 대표적인 소설입니다. 1925년에 출간되었는데, 당시에는 큰 빛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1940년에 피츠제럴드가 사망한 후 2차 대전이 발발하는데, 당시 비평가들의 재평가와 미군들에게 엄청난 인기에 힘입어 베스트셀러가 되고, 여세를 몰아 미국 고교 교과서에 실리면서, 미국 최고의 고전으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초상화(좌)와 그의 무덤(우)
어쩌면, 전체적인 스토리라인만 보면 지극히 전형적인 ‘삼각 관계’를 다룬 치정살인 이야기로 볼 수도 있겠는데요. 솔직히 도대체 개츠비가 왜 위대하다는 건지 선뜻 이해가 안 가더군요. 어쩌면 작가는 물질적인 풍요로움과 정신적 타락으로 점철된 1920년대를 배경으로 오로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끝까지 추구한 ‘개츠비’라는 진정 위대한 인물을 그리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1920년대보다 더욱 부(富) 자체를 열렬히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과연, 한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또는 지극히 평범하지만 순수한 가치를 위해 자신의 모든 일생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바로 우리 시대가 진정 필요로 하는, 위대한 영웅, 위대한 ‘개츠비’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에는 오스카 와일드의 고전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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