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3년 4월 13일 도쿄의 한 대형 서점에서 진풍경이 벌어졌습니다. 0시부터 판매가 시작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새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원제: 色彩を持たない多崎つくると、彼の巡禮の年)를 구매하기 위한 독자들이 줄을 끝없이 길게 늘어선 것이죠. 그리고 세 달 후, 그 진풍경은 그대로 서울로 옮겨 왔습니다. 한국 출간 7일만에 100만부 판매 돌파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운거죠.
도대체 이 소설의 어떤 점이, 작가의 어떤 특성이 이토록 충성스러운 독자들을 거느리게 된 것 일까요. 궁금해서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과연, 하루키의 작품답게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읽어 내려가는 강력한 스토리의 힘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제가 안내하는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책속으로 산책하실까요? 단, 이 안내서는 책의 내용을 상당부분 포함하고 있으니, 정말 하루키 신작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은 분들은 책을 먼저 읽고 이 안내서를 읽어 주세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라는 기묘한 제목의 비밀은 바로 이름에 있습니다.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는 나고야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네 명의 친구들과 그룹을 이루어 어울렸습니다. 그런데 다자키 쓰쿠루를 제외한 네 명의 친구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름에 색깔을 의미하는 한자가 포함되었다는 거죠. 그래서 그들은 차츰 이름대신 색깔로 서로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쿠로(黑), 아오(靑), 아카(赤), 시로(白)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다자키 쓰쿠루는 색깔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색깔 없는 녀석'이라고 규정해 버리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섯 명의 조합은 완벽했습니다. 균형미가 있었으며 에너지와 매력, 재능으로 가득했습니다. 비록 남자 셋, 여자 둘의 조합이었지만 이성적인 애정은 끼어들지 못했고 우정만이 존재했지요. 그런데 그 완벽함은 다자키 쓰쿠루가 그룹에서 홀로 도쿄로 대학진학을 하면서 깨어지는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쓰쿠루가 나고야를 떠난 후에도 우정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고야를 방문한 대학생 쓰쿠루는 어떤 위화감을 느낍니다. 늘 자신을 반겨주던 친구들이 자신의 연락을 피하는 거죠. 결국 쓰쿠루는 충격적인 말을 듣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연락하지 말아주면 좋겠어." 이유도 모른 채 단호한 절교선언을 들은 쓰쿠루는 몇 달 동안 홀로 침잠하면서 죽음에 근접합니다. 그리고 절망과 죽음에의 충동을 겪어낸 후 회복한 그는 이전과는 분명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외모도, 성격도요. 훌쩍 어른이 되어버린 거죠.
제목의 순례의 해는 소설 속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하는 음악, 헝가리의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를 의미하기도 하고 주인공 다자키 쓰쿠루가 십여년 만에 자신이 절교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 옛 친구들을 찾아 다니는 여정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자기는 어떤 문제를 마음에 끌어안고 있어. 그건 자기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뿌리가 깊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아마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 틈이 벌어진 역을 보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략) "이제 상처 입기 쉬운 순진한 소년으로서가 아니라 자립한 한 사람의 전문가로서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해야만 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게 아니라 봐야만 하는 것을 보는 거야. 그렇지 않으면 그 무거운 짐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야 해. 그러니까 네 친구의 이름을 가르쳐 줘. 그 사람들이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우선 내가 조사해 볼게."
절교를 당하고 십여년 뒤, 역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독신 남성 다자키 쓰쿠루는 비로소 진심으로 마음이 끌리는 여자 친구, 기모토 사라를 만납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에 앞서 진지한 조언을 합니다.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나서, 절교의 이유를 묻고 모호한 것을 명확히 마주보라는 것이죠.
그녀의 도움으로 쓰쿠루는 아오, 아카, 쿠로, 그리고 시로를 찾아 떠납니다. 그의 여정은 고향 나고야를 향했다가 저 멀리 북구의 핀란드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 순례의 길에서 마음의 상처, 서로를 좋아하던 마음, 오해, 배려, 말 못했던 진실이 드러나고 다자키 쓰쿠루는 옛 친구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죠. 그리고 자신이 존재감 없는 '색깔 없는 녀석',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가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1949년 일본 교토 시에서 태어난 무라카미 하루키는 1968년 와세다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재즈 카페 <피터 캣>을 운영하던 중 1979년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로 제 81회 군조 신인상을 수상하며 29세에 작가로 데뷔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소설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 <1Q84> 등이 있고 에세이집 <먼 북소리>, <무라카미 라디오> 등, 그리고 수많은 단편 소설집이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이 열렬히 사랑하는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도 하루키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는 예전에 한 CF에서 춘천 가는 기차 안에서 여인이 읽던 책으로 등장하기도 했고, 전작 <1Q84>의 판매부수가 200만권을 넘었습니다. 한국의 어떤 작가도 출간 당일 서점에 독자들을 줄 세우진 못하니까요. 이런 신드롬에 가까운 하루키의 인기를 두고 ‘닥치고 하루키’와 ‘하루키 까’는 있지만 ‘작가 하루키’는 없다라고 말하는 경향도 있지만 신작을 내놓을 때마다 ‘현상’을 낳는 그의 필력은 대단해 보입니다.
▲ 하루키의 신작이 판매된 1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독자들이 줄을 서서 책을 구입하고 있다.
(사진출처: 뉴시스)
요 근래 작가의 다른 장편 소설들을 다 읽어 본 제가 이 책을 읽고 처음 느낀 점은 '판타지적 요소가 없다.'라는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장편 소설에는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된 것들이 많습니다. 사라진 아내를 찾기 위해 빈 우물로 들어가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태엽 감는 새>가 그랬고, 두 개의 달이 뜨는 세상으로 스며들게 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1Q84>가 그랬듯이 말이죠. 그에 비해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기묘하고 갑작스러운 절교 선언으로 이야기가 시작되긴 하지만 현실에 건실히 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수의 독자들이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평하길, 1990년대 메가 히트작이었던 <상실의 시대>를 잇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제가 읽어보니 과연 그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더라고요.
그럼, 신작의 어떤 점이 <상실의 시대>와 비슷할까요?
1. 쿨한 독신 남성이지만 마음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주인공
무라카미 하루키 속 남자 주인공들에는 공통적인 느낌이 있습니다. 작가 본인의 생활 방식이 투영돼서 그런 걸까요? 두 소설 속 남자 주인공들은 아침에 샤워를 하고 간단히 샌드위치를 직접 만들어서 먹고 재즈 레코드를 들으며 점심에는 토마토와 오일이 들어간 깔끔한 파스타를 만들어 먹고 저녁에는 맥주 한 잔을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할 것 같은 깔끔한 독신 남성입니다. 하지만 두 소설 모두 주인공들에게는 마음의 상처가 남아 있지요. <상실의 시대>에서 첫사랑 나오코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고 살아가는 '와타나베'가 그랬고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 특별했던 친구들에게 어느날 불현듯 절교 선언을 당한 '다자키 쓰쿠루'가 그런 것 처럼 말입니다.
2. '현재'에서 주인공을 치유해주는 여인들
두 소설 모두 과거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주인공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의 곁에는 '현재'에서 그들을 치유해주는 여인들 역시 등장합니다. <상실의 시대>의 발랄한 미도리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성숙한 사라가 바로 그녀들이죠. 그녀들로 인해 주인공들이 과거를 직면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극복해가는 과정이 두 작품의 비슷한 느낌을 더해줍니다.
3. 비슷한 느낌의 마무리
고등학생 때 읽었던 <상실의 시대>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저는 마지막 장면을 꼽고 싶습니다. 비가 오는 거리에서 와타나베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수화기를 잡고 하염없이 미도리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는 묘한 장면에서 끝나지요. 와타나베와 미도리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그 여운에 한동안 잠겨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럼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는 과연 어떻게 마무리가 될까요? 이것은 직접 읽어 보시는 재미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고전 음악과 재즈 매니아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취향에 따라 그의 글에서 '음악'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상실의 시대>의 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입니다. 비틀즈의 노래에서 딴 제목이죠. 그리고 <1Q84>에서는 이름도 생소한 야나체크의 <신포니에타>라는 곡이 소설 속 중요한 모티브로 쓰였으며 이번 소설의 음악은 헝가리의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의 <르 말 뒤 페이> 입니다. 프란츠 리스트의 <순례의 해>라는 소곡집의 제 1년, 스위스에 들어있는 곡이죠.
이 곡은 소설 속 다섯 친구 중 가냘픈 음악소녀 시로가 고교시절 즐겨 연주했던 곡입니다.
"연주를 부탁하면 그녀는 곧잘 그 곡을 쳤다. <르 말 뒤 페이> 전원 풍경이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 향수 또는 멜랑꼴리." (본문 81p)
그리고 음악을 명시한 것 뿐 아니라 특정 음반까지 직접 언급하는 것 역시 음악 매니아 하루키다운 일이죠. 이번에 그가 소설 속에서 언급한 <르 말 뒤 페이> 음반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러시안 피아니스트 라자르 베르만(Lazar Berman)의 연주이고 둘째는 핀란드에서 쓰쿠루와 쿠로가 함께 듣던 알프레트 브렌델(Alfred Brendel)의 연주입니다.
'전원 풍경이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영문 모를 슬픔'이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요? <르 말 뒤 페이>를 들으면서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의 첫 페이지를 읽어 보는 것을 추천 드려요. 이왕이면 라자르 베르만의 연주로요.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를 따라 순례의 여정을 끝내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과연 나의 색채는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나의 색깔, 타인이 바라보는 나의 색깔 둘 다 포함해서요. 나는 과연 내가 누구인지, 누구일지 알면서 살고 있을까요? 어쩌면 내가 아는 나는 '나'라는 사람의 아주 좁고 편협한 부분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 봄 직한 문제인 것 같아요.
여러분도 하루키의 신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으며, 나의 색깔은 무엇인지, 지금 나는 어느 역에 서 있는지 생각에 잠겨 보는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