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어울리는 아시아 감성 영화를 추천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가을이네요. 아침 저녁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벌써 차가워지고, 초저녁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벌써?"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빨리 해가 지네요. 오늘은 쌀쌀해진 가을에 어울리는 감성 영화 네 편을 추천해 드리려 하는데요. 변해가는 날씨만큼이나 이 영화들의 쓸쓸하고 텅 빈 느낌, 슬픔, 끝,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만 누릴 수 있는 '가을'이라는 감성을 마음껏 누리시라는 의미에서 준비했습니다!
"1988년 7월 15일, 대학교 졸업식 날,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된 엠마와 덱스터. 뚜렷한 주관이 있는 엠마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는 포부와 ‘작가’라는 꿈을 향해 달려가지만, 부유하고 인기 많은 덱스터는 여자와 세상을 즐기고 성공을 꿈꾸며 서로 다른 길을 걷는다. 마음 속 진정한 사랑이 서로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 한 채 20년 동안 반복되는 7월 15일, 두 남녀는 따로 또 같이 삶의 순간들을 마주하는데…"
- 영화 소개 -
대학교 졸업식 날 함께 밤을 보낼 뻔 했던 엠마와 덱스터는 연인이 아닌 친구가 되기로 합니다. 남몰래 덱스터를 짝사랑했던 엠마지만 친구라는 관계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로부터 둘은 20년 동안 '사랑과 우정 사이'의 관계를 지속합니다. 어느 순간 부터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지만 계속 엇갈리기만 합니다.
힘들 때 서로를 의지하게 되지만 마음을 전하고자 할 때는 타이밍이 계속 도와주지 않습니다. 영화는 그들이 함께 하는 매년 7월 15일을 보여주는 독특한 방법을 택했습니다. 스무 번의 7월 15일이 지나고 길고 긴 엇갈림에도 종지부를 찍습니다. 하지만 비로소 사랑을 확인한 두 연인에게는 잔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너무 예쁜 포스터 때문에 찾아 보게 된 영화에요. <레미제라블>의 히로인 앤 해서웨이가 너무 예뻤기도 하고요. 엇갈리는 남녀, 시간의 흐름, 슬픈 결말까지 어딘지 진부한 느낌이 드는 설정이지만 매년 7월 15일이라는 하루를 보여주는 독특한 전개 방식, 예쁜 화면이 인상적이었던 영화입니다. 슬프고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에 눈물을 펑펑 흘리고 싶은 분께 추천드려요.
"어느 화창한 토요일 아침, 초겨울 찬바람을 맞으며 희수는 경마장에 들어선다. 두리번두리번, 경마장을 헤매는 희수. 마침내 병운을 발견한다. 병운과 눈을 마주치자 마자 내뱉는 희수의 첫마디. “돈 갚아.”
- 영화 소개 -
희수는 서른을 훌쩍 넘겼다. 그리고, 애인도 없다. 직장도 없다. 통장도 바닥이다. 완전 노처녀 백조다. 불현듯 병운에게 빌려 준 350만 원이 생각났다. 그래서 결심한다. 꼭 그 돈을 받겠다고. 병운은 결혼을 했고, 두 달 만에 이혼했다.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다가 실패하고 빚까지 졌다. 이젠 전세금까지 빼서 여행가방을 들고 다니는 떠돌이 신세다. 한때 기수가 꿈이었던 병운은 경마장에서 돈을 받겠다고 찾아온 희수를 만나게 됩니다.
병운은 희수에게 꾼 돈을 갚기 위해 아는 여자들에게 급전을 부탁합니다. 여자관계가 화려한 병운의 ‘돌려 막기’에 기가 막히는 희수지만 병운을 차에 태우고 돈을 받으러, 아니 돈을 꾸러 다니기 시작합니다. 한때 밝고 자상한데다 잘생기기까지 한 병운을 좋아했지만, 대책 없는 그를 이제는 더 이상 믿을 수가 없습니다. 1년 전엔 애인 사이, 오늘은 채권자와 채무자…… 길지 않은 겨울 하루, 해는 짧아지고 돈은 늘어갑니다. 다시 만난 그들에게 허락된 ‘불편한 하루’가 저물어 갑니다.
달콤하지 않은, 초겨울 같은 느낌의 영화에요. 두 남녀 주인공은 더이상 연인이 아니고 그들이 함께 하는 것도 데이트가 아닙니다. 영화는 그다지 길지 않은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을 담고 있어요. 고독과 침잠 속에서 왜 일년 전 헤어진 그가 떠오른 것인지, 희수는 그것이 350만원이 돌려받지 못한 것 때문이라고 합리화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것이 진짜 이유가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사랑이 남은 것도 명백히 아닙니다. 그냥 그 설명하기 어려운 묘한 감정의 잔여겠죠. 건조하고 까칠한 희수의 태도와 오랜만에 만난 그녀에게 조금은 반가운 마음이 드는 병운. 더이상 연인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의 둘은 딱 하루 동안 함께 돈을 꾸러 다닙니다.
"참 편한 사고 방식이야."
희수의 눈에 병운은 여전히, 아니 오히려 마지막 기억보다 훨씬 더 한심해 보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오후가 되고, 늦은 오후가 되고, 해질녘이 되가면서 병운의 낙천적인 뻔뻔함과 대책없는 밝음, 속깊은 잔정에 희수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찾아옵니다. 하지만 이미 이 짧은 하루는 끝나가고 있습니다. 해가 질수록 관객들은 조급해집니다. 과연 저 해가 완전히 저물어서 밤이 찾아오면 이 하루는 어떤 모습으로 끝나게 될까.
"그래 니 말 맞다. 내가 뭔 상처를 받아봤겠냐? 근데 나도 뭐, 쪼금은 아팠어."
사랑을 해봤고 이별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적 대사들, 영화에 모던한 감성을 더해주는 재즈 풍의 ost,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둔 열린 결말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바꿔줄 운명적인 사랑이 나타날 것이라 믿는 순수청년 ‘톰’, 어느날 사장의 새로운 비서로 나타난 썸머를 처음 보는 순간 강렬한 스파크를 일으키며 자신의 반쪽임을 직감한다. 이후 대책없이 썸머에게 빠져드는 톰"
그녀에게 접근하기 위한 부단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랑도 남자친구도 눈꼽만큼도 믿지 않고 구속받기 싫어하는 썸머로 인해, 그냥 친구 사이로 지내기로 하지만 둘의 사이는 점점 그 이상의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그녀를 천생연분이라 확신하는 톰. 이제 둘 관계의 변화를 위한 선택이 필요한 순간이 다가오는데...
어수룩한듯 순수한 눈빛이 매력적인 배우 조셉 고든 레빗의 매력에 홀딱 빠져서 본 영화에요. 사랑에 빠진 남자, 아니 사람의 찌질함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보여준 영화기도 하고요. 순차적 전개가 아닌,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뒤죽박죽의 편집도 재미있습니다.
썸머에게 반했고 썸머와 사랑했고 썸머와 행복했지만 사랑이란 그렇죠. 나 혼자만의 마음으로는 완성될 수 없잖아요. 모든 사랑했던 사람이 그렇듯 원하는 만큼의 사랑을 상대로부터 돌려받지 못할 때 사랑은 집착으로 변하고 집착은 이별을 부르고 이별은 미련을 남깁니다. 영화의 말미에 톰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화면분할이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주는데요, 그래도 이 영화가 톰의 슬픔과 절망을 풀어내는 방식은 무겁기 보다는 제법 가볍습니다.
제목부터 썸머가 들어가는 이 영화를 왜 가을에 어울리는 영화로 추천했는지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그 답이 나와 있어요. 사랑의 설레는 시작과 쓸쓸한 종말까지를 보고 싶은 분, 하지만 너무 무겁고 우울한 영화는 싫으신 분, 코미디 아닌 코미디 영화를 찾는 분께 추천드려요.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확인하면 나도 모르게 입가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집니다.
"홍콩의 천재적인 작가 겸 감독 왕가위는 사랑의 종말에 던지는 애수에 젖은 시선으로 짙은 쪽빛의 분위기를 띤 채 불안하게 반짝이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대부분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한 「해피 투게더」라는 역설적인 제목의 영화가 그것이다."
중국에서 이민 온 연인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은 함께 살 수 있는 곳을 찾아 그곳에 정착하지만 둘의 상반된 성격(조용하고 책임감 있는 성격과 충동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은 곧 화해할 수 없는 차이로 번지고 그것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된다.
마지막 추천 영화는 홍콩 영화에요. 하지만 배경은 저 멀리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입니다. <해피 투게더>는 저에게 동성애 영화에 대한 편견을 여지없이 깨뜨려 준 영화인데요. 서로 마음을 주고, 그래서 상처받을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였고 그 보편적인 감성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지요.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를 반복하는 두 연인. 사랑했기 때문에 한없는 미련을 안고 그 관계는 쉽사리 끊어지지 못합니다. 그 과정은 꿈같은 달콤함과 나락으로 떨어지는 절망의 반복입니다.
택시 뒷자석에서 보영이 아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장면이나 둘이 주방에서 함께 탱고를 추는 장면에서는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물어지는 사랑은 느릿하지만 확실하게 종말을 향해 갑니다. 결국 모든 것이 완전히 끝났을 때 아휘는 둘이 함께 오기로 했던 이과수 폭포를 홀로 찾습니다. 폭포 밑에서 쏟아지는 물을 한없이 바라보는 장면을 영화는 아주 길고 긴 롱테이크 장면으로 보여줍니다. 그 장면 하나로 사망해버린 사랑의 먹먹함이 화면 밖까지 전해집니다.
젊은 양조위와 이제는 만날 수 없는 아름다운 배우 장국영의 매력에 오롯이 빠질 수 있는 영화인데요. 왕가위 감독이 왜 천재라고 불렸는 지 알게 해 준 작품이기도 하고요. 지구 반대편의 낯선 도시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화면 속에서 애수어린 밀롱가 음악과 함께 쓸쓸한 사랑의 종말의 과정을 다룬 영화입니다. 가을 밤, 새벽녘에 잘 어울리는 영화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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