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새벽, 스페인 세비야의 과달키비르江. 강가의 바람이 선선하다.
한 남자가 위풍당당한 빅토리아호의 함교에 서있다.
이제 여명이 걷히면 출항해야 한다.
선원들의 움직임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의 심복 안토니오는 뭔가를 깨알같이 쓰고 있다.
출항에 앞서 5척 선단의 준비 현황을 적고 있었다.
안토니오 눈빛에는 특유의 꼼꼼함을 넘어선 어떤 비장함이 서려 있었다.
▲ 16세기 세비야 풍경(출처: wikipedia, wikimedia Common)
남자의 시선이 항해 지도에 고정된다.
그런데, 그의 지도에는 행선지가 명확히 표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가슴 속엔 바로 그곳이 생생히 그려져 있었다.
가보지는 못했지만, 그곳에 사는 그의 절친한 친구 프란시스코의 편지는
그의 마음을 늘 그곳에 묶어 놓았다.
이제 출항이다. 가자 미지의 그곳으로!
그 남자는 훗날 세계 최초의 세계 일주에 성공한 자로 인정받는 '페르디난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입니다. 1519년 8월 10일 스페인의 세비야 항구에서 출항을 앞둔 그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았습니다. 그의 목적은 세계 일주라기 보다는 세계적인 향료 산지인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로 가는 서쪽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였죠.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 이후, 소위 '대항해 시대'에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치열한 영토 확장 경쟁은 수많은 모험가들을 낳았습니다. 마젤란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 (좌) 페르디난드 마젤란, (우) 마젤란의 빅토리아호(출처: wikipedia, wikimedia Common)
사실 마젤란은 앞서 그려 본 항해 도중에 사망합니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남아메라카 남단의 마젤란 해협을 거쳐 태평양을 횡단한 그는 지금의 필리핀 세부 섬에서 지역 부족 간의 전쟁에 개입하다가 살해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그가 최초의 세계일주에 성공한 사람이라 할 수 없겠죠. 그런데, 이 항해 이전에 마젤란은 동쪽 항로로 이미 스페인에서 필리핀까지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에 남은 공식적인 '세계 최초 세계 일주자'로 인정된다고 합니다.
▲ 마젤란 항로(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그의 사후, 그와 동행했던 후안 '세바스찬 엘카노(Juan Sebastian Elcano, 1476-1526)'가 십여 명의 생존자와 유일하게 남은 빅토리아호를 이끌고, 근 3년 만에 세비아 항으로 돌아옵니다. 그 기나긴 여정은 세계 일주를 끝까지 완주한 마젤란의 심복이자 서기였던 '안토니오 피가페타(Antonio Pigafetta, 1491-1531)'의 항해 기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세계 일주. 아마 대부분 사람들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로망 중 하나일 겁니다. 간혹 한 가족이 인생 최고의 추억을 만들기 위해 1년 정도 세계 일주를 한 이야기를 접하긴 합니다만, 세계 일주에 필요한 막대한 비용이나 시간을 차치하고서도 세계 일주를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모험이죠.
이번에 다루는 '쥘 베른(Jules Verne, 1828-1905)'의 '80일간의 세계 일주(Le tour du monde en quatre-vingts jours, 1873 作)'도 세계 일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상 과학 소설의 아버지, 쥘 베른은 생전에 무려 80여 편의 공상 과학 및 모험 소설을 썼고, 그 중 60여 편을 생전에 출판했습니다.(출처: wikipedia) 특히, '15 소년 표류기', '해저 2만리' 등은 이 '80일간의 세계일주'와 함께 저의 어린 시절 필독서였을 뿐 아니라, 요즘 어린이들에게도 인기 있는 고전 중에 고전이죠.
▲ (좌)쥘 베른(출처: wikipedia, wikimedia Common), (우)80일간의 세계일주
80일간의 세계 일주'는 1956년 미국의 마이클 앤더슨 감독에 의해 최초로 영화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1957년에 미국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자이언트', '왕과 나', '십계' 등 영화사의 명작들을 제치고 작품상, 각색상, 촬영상, 편집상, 음악상, 등 굵직한 분야에 총 5개 부문을 수상했습니다.
다큐멘터리 형태의 내레이션으로 이 영화는 시작됩니다. 비행기, 잠수함, TV, 로켓과 같은 현대 문명의 대표적인 기술들이 19세기 사람 쥘 베른의 소설 속에 이미 들어있었다는 거죠. 특히, 영화사에 길이 남을 최초의 SF 영화인 조르주 멜리어스(Georges Méliès, 1861-1938) 감독의 14분짜리 영화인 ‘달세계 여행(Le Voyage dans la Lune, 1902)’을 보여줍니다. 이 영화 속의 단편 영화에선 로켓을 대포로 쏘아 달까지 보냅니다. 쥘 베른의 소설 ‘지구에서 달까지(De la terre à la lune, 1865년 作)’을 영화로 각색한 것이죠.
▲ (주)달세계 여행(출처: wikipedia, wikimedia Common), (우)A Trip to the Moon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
사람 얼굴을 한 달이 대포를 맞는 장면은 아마 많은 분들이 익숙한 그림일 겁니다. 이어서 실제로 쥘 베른의 소설처럼 1956년 당시 미국에서 실제로 행해진 우주 탐사를 위한 로켓 발사 장면과 인공위성이 촬영한 사진들을 보여 줍니다. 과학 기술로 세계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말이죠. 이제 1956년 作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대작 영화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때는 1872년. 유쾌한 프랑스인 파스파르투(Passepartout)가 자전거를 타고 런던 시내를 유유히 지나갑니다. 주위엔 온통 마차들 밖에 없죠. 파스파르투는 직업 소개소로 가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필리어스 포그(Phileas Fogg)'의 하인직 면접에 당당히 합격합니다. 이미 지난 6개월 간 수많은 하인들이 차갑고 괴팍한 필리어스 포그의 성격 때문에 울분을 토하며, 그만 둔 상황이었죠. 필리어스 포그는 매우 까다로운 인물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목욕물은 욕조에 1 피트 3.5인치만큼 받아야 한다', ''토스트는 화씨 83도로 구워야 한다', '아침은 8시 24분에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뭐, 이런 식입니다.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필리어스 포그는 매일 남성 전용 사교클럽인 리폼 클럽(Reform Club)에서 회원들과 카드 게임을 즐깁니다. 어느 날 영란은행(Bank of England)에 강도가 침입하여 5만 5천 파운드를 훔친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즈음, 리폼 클럽에서 한 회원이 포그와 카드 게임을 하면서, "이 은행털이 사건은 백 년 전만 해도 세계적인 사건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3개월만에 지구를 돌 수 있는 시대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취지의 언급을 합니다.
이에 포그는 정확히 80일이면 가능하다고 응수합니다. 이 두 사람은 끝내 내기를 하게 되는데요. 포그는 자신이 80일간 세계일주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겠다면서 베어링스 은행의 자신의 계좌에 있는 전 재산의 절반인 2만 파운드를 겁니다. 다른 회원들은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며, 모두 그 내기에 동참하죠. 그 날 바로 포그와 그의 하인 파스파르투는 여행 경비로 쓸 나머지 절반의 돈 2만 파운드를 찾아, ‘80일간의 세계일주’라는 장도에 오릅니다. 포그 일행의 여행 계획 경로는 이렇습니다.
▲ 80일간의 세계 일주 이동경로 지도(출처: wikipedia, Wikimedia Commons, author_Roke)
경로 |
교통 수단 |
소요 일수 |
런던에서 수에즈 |
기차와 증기선 |
7일 |
수에즈에서 뭄바이 |
증기선 |
13일 |
인도 뭄바이에서 콜카타 |
기차 |
3일 |
인도 콜카타에서 홍콩 |
증기선 |
13일 |
홍콩에서 요코하마 |
증기선 |
6일 |
요코하마에서 샌프란시스코 |
증기선 |
22일 |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 |
기차 |
7일 |
뉴욕에서 런던 |
증기선과 기차 |
9일 |
합계 |
80일 |
▲ 출처: 위키백과
왜 필리어스 포그는 이런 여행 경로를 잡았을까요? 당시의 기술로서 가장 빨리 주파할 수 있는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위해서 입니다. 당시의 세 가지 교통 기술의 혁신이 이를 가능케 했습니다. 바로 대륙횡단철도, 증기선 그리고 수에즈 운하입니다. 필리어스 포그는 당시로서는 가장 속도가 빠른 교통수단이었던 철도를 최대한 길게 갈 수 있는 경로를 선택했습니다.
실제로 19세기 말에 인도와 미국(1869년)에 대륙횡단철도가 개통되었죠. 나머지 경로는 차선 교통수단인 증기선을 이용했고요. 특히, 1869년도에 개통된 수에즈 운하는 해상 유럽과 아시아를 잊는 획기적인 경로였죠.
▲ (좌)수에즈 운하(위성사진) (우)1869년 최초 대륙횡단 철도 완공식(출처: wikipedia, wikimedia Common)
필리어스 포그는 특유의 꼼꼼함을 기초로 아주 치밀하게 여행 계획을 세웠습니다. 중간에 발생할 수 있는 여행을 지연 시킬 수 있는 다양한 변수들을 충분히 반영하였고요.
한편 포그는 영란은행의 강도 용의자와 용모가 비슷하고, 큰 돈가방을 들고 영국을 도망치는 듯한 행동 때문에 픽스(Fix) 형사에 의해 여행 내내 은밀한 추격을 받습니다. 특히, 당시 영국 관할이었던, 인도와 홍콩에서는 포그 일행을 잡기 위해 무진 애를 쓰지만 실패하고, 이후 일본과 미국으로 향할 때는 오히려 포그 일행의 수호자로 돌변합니다. 그가 무사해야 영국에서 체포할 수 있기 때문이었죠.
포그 일행은 인도에서 한 부족장의 장례식에서 산 채로 화장될 뻔한 부족장 부인 아우다(Aouda)를 구출합니다. 이후 아우다는 포그 일행과 여행을 함께 합니다. 한편, 홍콩에서 파스파르투가 픽스의 술책에 속아 포그와 아우다 일행을 놓치게 되죠.
그는 홀로 다음 목적지인 요코하마까지 고생 끝에 당도하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포그, 아우다 그리고 픽스와 재회합니다. 그들은 마지막 목적지인 미국으로 향하고, 미국에서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뉴욕까지 긴 여정을 함께 합니다. 온갖 난관들이 그들을 가로막지만, 필리어스 포그의 침착함과 기지로 일정대로 여행을 계속합니다.
▲ (왼쪽부터) 파스파르투, 필리어스 포그(출처: 네이버 영화)
마지막 여정은 바로 뉴욕에서 대서양을 건너 런던까지 가는 겁니다. 이들은 최대의 난관에 봉착하죠. 다름아닌 증기선의 연료인 석탄이 런던을 눈앞에 두고 바닥납니다. 이때 필리어스 포그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바로 증기선의 목재 선채를 뜯어내어 연료로 쓰는 것이죠. 대단하죠.
드디어, 리버플에 도착한 포그 일행. 런던까지 기차로 가기만 하면, 정확히 80일간의 세계 일주가 완결됩니다. 바로 그때, 픽스 형사가 필리어스 포그를 체포합니다. 영란은행 강도 혐의로 말이죠. 다행히 진범이 잡혀서 석방되었지만, 감옥에서 하루를 꼬박 허비한 포그. 이제 '80일간의 세계 일주' 내기에서 져서 파산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 (왼쪽부터) 필리어스 포그, 파스파르투, 아우다(출처: wikipedia, wikimedia Common)
포그, 아우다, 파스파르투는 런던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우다는 자신의 생명의 은인이며, 여행 내내, 영국 신사로서의 풍모와 침착함을 잃지 않았던 포그에게 자신과의 결혼을 청합니다. 포그도 그간 숨겨왔던 사랑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고, 아우다의 청을 받아들이죠. 포그는 파스파루투에게 이웃에 사는 목사님을 모셔오라고 합니다. 파스파르투가 목사님을 모시고 오는 길에 신문팔이가 오늘이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임을 알게 되죠. 포그 일행은 동쪽으로 세계 일주를 하여 소위 날짜 변경선을 통과하여 하루를 벌게 된 겁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에 성공한 것이죠. 포그는 서둘러 리폼 클럽으로 향하고 마침내 내기에 이깁니다.
▲ 1956년 80일간의 세계 일주 영화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는 포스터에 있듯이 기구를 타고 유럽을 횡단하는 등 몇몇 장면을 제외하고는 원작 소설을 충실히 반영했습니다. 1956년 당시로서는 드물게 인도, 홍콩, 일본, 미국 등 현지 촬영을 감행했죠. IMdB(Internet Movie Database)에 따르면, 600만 달러라는 엄청난 제작비를 들였고, 미국에서만 4,2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고 합니다. 거의 3시간에 가까운 긴 상영 시간이 다소 지루한 감이 없지 않으나, 여행지의 풍광을 아름답게 담아낸 것 같습니다.
'80일간의 세계 일주' 2004년도에 리메이크 되는데요. 무려 1억불이 넘는 제작비를 들였다고 합니다. 이 영화에서 세계적인 액션 스타 청룽(성룡)이 파스파르투 역으로 나옵니다. 스토리도 원작의 근간을 바탕으로 새롭게 각색되었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필리어스 포그가 괴짜 과학자로 나오고, 원작의 리폼 클럽이 영국과학아케데미로 바뀌며, 파스파르투가 영란은행에 보관된 옥부처상을 훔칩니다. 원래 자신의 고향(중국)의 마을에 대대로 내려오는 신성한 성물이기 때문이었죠, 그가 도망가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필리어스 포그와 함께 세계 일주 여행을 하게 됩니다. 물론 포그는 과학아케데미 회원들과 '80일간의 세계 일주' 내기를 하고요.
▲ 2004년 80일간의 세계 일주 영화 포스터와 스틸컷(출처: 네이버 영화)
이 영화에서도 포그 일행은 기상천외한 모험을 하는데, 맨 마지막에 포그가 고안한 비행기로 대서양 한복판에서 런던으로 날아갑니다. 포그는 당연히 내기에 이기게 되죠.
이처럼 쥘 베른의 상상력은 시대를 초월하여 현재까지 다양한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작품 '해저 2만리(1869년 作)'에 나오는 잠수함 '노틸러스 호'는 1952년에 건조된 미국 최초의 원자력 잠수함에 그 이름을 전합니다.
▲ 노틸러스 호[USS Nautilus (SSN-571)] 진수식(출처: wikipedia, wikimedia Common)
사실 쥘 베른은 생전에 프랑스 문학계로부터 제대로 주목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1979년 이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번역되었다고 하는군요.(출처: wikipedia) 그가 이처럼 미래를 예측하고 상상력 넘치는 수많은 작품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은 그의 성실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매일 새벽 4시에서 저녁 8시까지 책상에 앉아서 집필과 자료 탐독에 몰두했고, 무려 25,000개에 달하는 표제어를 붙인 자료 정리함을 갖고 있었다고 해요.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접하고 나서, 탁월한 상상력의 원천은 천재성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집요한 연구와 상상을 초월하는 부단한 노력에서 오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연말을 맞아 영국의 대문호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을 다루겠습니다. 2009년도에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이 3D 애니메이션 영화로 제작하여 좋은 평가를 받은 바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