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초반, 재미있게 읽었던 책 중에 ‘키다리 아저씨’라는 소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기억하고 계실지 모르겠네요. 키다리 아저씨는 1912년 여류 소설가 진 웹스터가 발표한 서간문(편지체) 형식의 소설이랍니다. 고아 소녀인 제루샤 애보트(애칭 주디)가 키가 큰 정체불명의 후원자 덕분에 대학교에 진학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은 내용이었죠.
소설 스포를 하자면요. 자신을 도와주던 든든한 후원자가 알고 보니 주디의 대학 친구인 줄리아의 삼촌이자 젊은 귀족 인 저비스씨(심지어 미남!)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와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답니다. 키다리 아저씨는 뭇 소녀들에게 자기도 모르는 후원자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로망을 심어주며 키다리 아저씨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큰 인기를 끌었답니다.
▲ Movie: Daddy Long Legs 1955 출처: http://candimandi.typepad.com/
키다리 아저씨 내용 중에 어렴풋이 기억나는 장면이 있는데요. 바로 주디가 대학교에서 첫 번째로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에피소드입니다. 고아인 것을 친구들에게 숨기고 있는 주디는 키다리 아저씨가 보내 준 금화 다섯 개로 자신의 크리스마스 선물을 구매하는데요. 그 중에 ‘비단 양말’이 있답니다.
주디가 비단 양말을 구매한 것은 콧대 높고 잘난 척이 심한 귀족 아가씨 줄리아 때문입니다. 평소 줄리아는 비단 양말을 신으며, 친구들에게 자랑을 하곤 했는데요. 요즘은 누가 비단 양말을 신고 다니나 싶지만, 키다리 아저씨 소설이 쓰여진 19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비단은 매우 희소하고 비싸서 귀족과 부자들의 사치품이었다고 하네요.
비단은 우리 인류 역사에서 최고의 직물이자 사치품으로 여겨집니다. 비단은 피부에 닿는 부드러운 촉감과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속성을 지녀 오랜 역사 우리 인류에게 사랑 받아 왔습니다. 중국에서 그 역사가 유래되었다는 비단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대단히 복잡하고 까다로운 공정을 거쳐야 했는데요. 비단의 재료인 견사는 누에 고치를 끓는 물에 담가서 끈적한 분비물을 제거한 후에 고치에서 생사를 풀어 릴에 감아 내어 생산합니다.
고치 하나에서 나오는 비단실은 적게는 400미터에서 3,000미터까지나 된다고 하네요. 처음 비단은 왕족과 귀족만 누릴 수 있는 사치품이었지만 점차 서민들에게도 허락되었습니다. 물론 가격은 무척 높아서 아무나 가질 수 없었죠. 비단의 이러한 희소가치 덕분에 교역 상품으로 이용되거나 화폐의 기능을 대신하기도 했답니다.
그리고 비단 무역이 점차 활성화 되면서 비단이 오가는 길이라 하여 실크로드가 생겨나게 되지요. 현재의 실크로드는 중앙아시아를 가로지르는 교역로를 뜻하고 있지만, '비단길'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만큼, 당시 비단 무역의 규모를 알 수 있는 상징적인 이름이죠.
▲ 비단의 단백질 분자 사슬. R(*)은 판 위의 기를, R’는 판 아래의 기를 나타낸다.
비단은 동물성 섬유로 그 성질이 단백질이랍니다. 비단의 단백질 사슬들은 무척 오밀조밀하여 빈틈이 없기 때문에 고른 표면과 부드러운 감촉을 만들어 낸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른 표면은 빛을 반사하고, 비단 특유의 윤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죠.
비단이 지닌 규칙적인 분자 배열 구조가 비단의 광택은 물론 염색 또한 용이하게 하는데요. 비단의 20%를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고운 결정구조가 염료 분자들과 쉽게 결합하여 선명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단백질 분자형태가 주는 강하고 아름다우며, 염색성이 뛰어난 이점 때문에 비단은 우리 역사에서 귀중하고 최고의 섬유로 여기게 된 것이죠.
* R(기): 아미노산 단위체
비단은 한 종류의 아미노산 단위체(그림 ‘기’ R)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세계 1차 대전까지만 해도 우리 인류 역사에서 비단의 시대였고 비단 양말은 부녀자들에게 최고의 호사품이었습니다. 하지만 2차 대전 발발 후 일본으로부터의 비단 수입이 단절되면서, 비단을 대체하기 위한 화학섬유 나일론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고 비단 양말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죠.
아미노산의 고운 결정 구조를 지닌 비단을 흉내 내어 인조 섬유를 만드는 것은 무척 어려운 시도였습니다. 하지만 비단을 찾는 사람들의 높은 수요와 비단이 지닌 희소성 때문에 과학자들은 비단을 닮은 섬유를 만들어 내기 위해 박차를 가했죠.
그래서 합성 비단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는데요. 하지만 이렇게 완성된 합성 비단의 분자구조는 단순 반복된 구조일 뿐, 비단의 유기구조와는 거리가 멀었답니다. 오늘날에도 화학적으로 비단이 지닌 규칙적인 화학 배열을 만들어 내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며, 비단을 생산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이 소요된답니다.
▲ 윌리스 캐러더스. 출처: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Wallace_Carothers
19세기에 샤르도네와 에드워드 베번 등이 인조비단에 도전하지만, 완전하지는 않았답니다. 그러던 중에 1938년 듀폰사가 최초로 나일론을 발표합니다. 듀폰사는 시장에 내놓을 새로운 플라스틱 섬유 발명을 하버드 대학의 교수이자 유기화학자였던 윌리스 캐러더스에게 요청했는데요. 캐러더스는 4년의 연구 끝에 분자량이 높은 중합체를 만들어 내며, 비단의 특성을 가장 가깝게 흉내 낸 인조비단 나일론을 완성합니다. 안타깝게도 우울증을 앓고 있던 캐러더스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면서 자신이 만들어낸 중합체가 상용화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을 감게 되지만요.
▲ 나일론 분자사슬. 출처: 위키피디아 http://ko.wikipedia.org/wiki/
나일론은 '폴리아마이드'라는 것으로 중합체 단위들이 '아마이드 결합'으로 연결되어 있답니다. 비단은 한 종유의 단위체가 아마이드로 연결된거라면, 나일론은 두 종류의 단위체가 결합한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죠.
▲ 나일론 아마이드 결합. 출처: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Nylon
하지만, 비단과 나일론은 비슷한 유산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나일론의 아마이드 결합은 비단과 마찬가지로 아미노기의 H와 유기산기(COOH)의 OH가 만나 물이 생성되고, 탈수되는 과정을 거쳐 결합이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동일한 결합을 하기 때문에 화학적인 유사점이 있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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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로락탐 결합. 출처: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Caprolactam
나일론 섬유(나이론 6)의 주원료는 바로 '카프로락탐'이라는 성분입니다. 카프로락탐은 벤젠과 수소를 반응시켜 얻어진 사이클로헥산을 공기 산화하여 사이클로헥사논을 만든 후 암모니아와 합성하여 제조합니다. 한화 케미칼에서는 카프로락탐 제조에 필요한 원료들을 생산하고 있는데요. 그 대표적인 소재가 '가성소다(NaOH)'입니다.
한화 케미칼에서 생산하는 가성소다는 제지, 섬유, 세제, 금속, 식품, 전기 등 광범위한 산업 분야에 쓰이며, 주로 수질 및 대기오염 방지를 위한 수처리 용도로 사용되고 있답니다. 한화케미칼의 CA사업은 국내 최대의 생산능력과 내수시장 점유율 및 수출 1위의 규모를 자랑한답니다.
▲ 스타킹을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출처: http://katemckay.ca/history-lesson-nylon-riots-part-two
1940년 5월 15일 세계 최초로 나일론 스타킹이 미국에서 판매되었을 때, 스타킹을 구매하려는 엄청난 인파들이 몰려 거리를 가득 메었다. 나일론은 비단의 장점 그대로, 잘 늘어지는 성질과 더불어 쉽게 구겨지거나 헤지지 않으면서 가격은 훨씬 저렴했기 때문에 대량 생산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상업적으로 다양하게 이용할 수 있답니다. 대표적으로 나일론 스타킹이 있는데요. 스타킹은 처음 출시되자마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됩니다.
▲ 스타킹 공장 사진. 출처: http://www.kitsch-slapped.com/
질긴 나일론의 성질 덕분에 모기장, 밧줄, 타이어 코드 등 군용제품으로도 생산되어 전쟁에서도 유용하게 사용하게 되었죠. 그리고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뒤로 나일론의 활용 범위는 더욱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나일론에 대해 짚어보다 보니, 비단과 나일론은 화학적인 유사점 외에 또 다른 공통점이 있는 것 같네요.
바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섬유라는 점이죠! 비단이 우리 역사, 문화, 생활에 큰 영향을 주었듯이, 나일론의 등장 또한 섬유, 패션, 의료, 공업 등 우리 실생활 다방면에서 활용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잖아요.
과거 실크로드가 존재한 것처럼 현재 우리는 나일론의 주재료 석유와 관련된 무역이 활발한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요. 비단과 나일론 다음으로 앞으로 어떤 섬유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 참고 -
- 인공 염료와 화학 산업 (기술의 역사 (뗀석기에서 유전자 재조합까지), ㈜살림출판사)
- 역사를 바꾼 17가지 이야기 페니 르 쿠터, 제이 버레슨, 사이언스 북스
- 한화케미칼 홈페이지 http://hcc.hanwh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