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이면 ‘광복절’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광복절이 되면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쳤던 독립운동가들을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을 되새기게 되는데요. 일제의 억압정책으로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학문에 대한 호기심조차 사치였던 시절, 이태규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노벨상에 도전하여 한국 과학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화학자가 됩니다.
일제강점기의 온갖 차별과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현대 화학의 기반을 구축하고, 초석을 다진 공을 인정받아 과학자로는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이태규 박사. 학문에 대한 열정과 국내를 비롯해 세계의 과학발전에 미친 그의 업적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호기심 천재
1902년 1월 26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이태규 박사는 어린 시절 천자문을 열흘 만에 다 떼어 신동이라 불리었습니다. 또한 어려서부터 호기심과 관찰력이 뛰어났는데요.
어느 날 장터에 간 어린 태규는 좌판에서 파는 병아리를 보던 중 깃털 색이 특이한 병아리만 한참을 바라보았습니다. 병아리 장수가 태규에게 이유를 물으니, 태규는 "저 병아리는 깃털 색깔이 다르니 행동도 다를 것 아니에요. 다른 병아리들과 어떻게 다른 행동을 하는지 관찰하는 거예요."라고 답했습니다.
또 다른 어느 날에는 제삿날 촛불의 그림자 크기가 시간이 지나도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아버지에게 “햇빛에 비친 그림자는 길이가 짧았다 길어졌다 하는데 촛불 아래의 그림자는 왜 변하지 않나요?”라는 질문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외에도 궁금한 점이 있으면 아버지에게 이해될 때까지 집요하게 질문하였으며, 아버지는 어린 태규의 질문에 잘 설명해 주었다고 합니다.
과학에 흥미가 생기다
태규가 소학교 3학년이 되던 해 교장 선생님이 일본인 소학교에서 실험도구를 얻어와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은 후 여러 가지 실험을 진행하였습니다. 그중 스위치 조작에 따라 번쩍번쩍 빛을 내며 앞뒤로 움직이는 모형 전차 실험이 있었는데, 평소 팽이나 제기를 가지고 놀던 태규에게 이 모형 전차 실험은 ‘과학’에 대한 흥미를 느끼게 된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태규는 1915년 경성고보에 입학한 후 4년 내내 수석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도서관에서 화학 반응을 다룬 과학 소설을 읽으며 화학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고, 화학 공부에 더욱 빠지게 됩니다.
이후 태규는 사범과로 들어가 화학 공부를 계속하였습니다. 어느 날 산소 제조 실험을 하던 중에는 촉매작용 관련하여 과학적으로 밝혀진 게 없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고, 아무도 모르는 현상을 처음으로 밝혀내는 과학자에게 큰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일본 유학을 떠나다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나라가 일본 식민지에서 벗어나려면 과학을 공부해야 한다’는 풍조가 있었지만 과학 분야를 공부하는 학생은 없던 시기였습니다. 한국인에게는 과학기술을 가르치지 않으려는 일본의 정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화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기 위해서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야 했는데, 집안 형편을 비롯해 한국인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천신만고 끝에, 지인의 도움으로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로 유학을 간 태규는 2학년 이후 계속 수석을 차지하는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1924년 차석으로 졸업하였습니다. 하지만 졸업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차별 대우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태규는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1924년 교토제국 대학에 입학해 학문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으며, 그렇게 우리나라 제1호 이학박사를 목표로 공부하여 1927년 교토제국 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1호 화학박사가 되다
이태규 박사는 교토제국 대학교를 졸업 후 본격적인 연구에 들어선 지 4년 만인 1931년에 ‘환원 니켈을 이용한 일산화탄소의 분해’라는 논문으로 한국인 최초로 화학 분야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아사히 신문 등 일본 언론들도 보도할 정도로 큰 화제였으며, 배움의 기회를 빼앗긴 우리 민족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세계적인 과학자로 발돋움
이태규 박사는 1937년 일본 제국대학의 한국인 최초로 조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38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으로 가 당시 촉매학의 권위자인 테일러 교수와 함께 촉매작용에 대해 공동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화학과의 헨리 아이링(Henry Eyring) 교수 연구실로 옮긴 후 1940년 쌍극자 능률 계산에 대한 논문을 발표합니다. 이는 당시 최첨단의 양자역학 이론을 도입한 연구로, 후에 교토제국 대학으로 돌아가 일본에 양자화학을 도입하여 큰 업적을 남기게 됩니다.
한국 과학계 발전에 기여하다
1945년 해방 후 고향으로 돌아온 이태규 박사는 경성제국대학 이공학 부장으로 취임, 1946년 해방 후 혼란스러웠던 당시 상황 속에서도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 학장과 대한 화학회 초대회장을 역임하며 학문 연구와 교육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며 한국 화학계 발전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948년 미국 유타대학으로 간 이태규 박사는 아이링 교수와 함께 ‘비뉴턴 유동이론’을 연구해 ‘리-아이링 이론’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연구활동으로 세계적인 과학자가 됩니다. 당시 유타대학에는 수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들어 화학, 물리학 등 과학 분야에서 지도를 받았으며, 우수한 학자들을 양성해 한국 과학계에 이바지하였습니다.
이태규 박사는 50여 년을 일본과 미국에서 보내며 촉매작용, 반응속도론, 유변학, 액체 이론 등 분야에서 우수한 논문을 발표했으며, 미국 화학회의 산업 및 공업화학 분과로부터 상패를 받기도 했습니다. 1965년에는 화학 분야 노벨상 추천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69년 ‘리-아이링 이론(Ree-Eyring theory)’으로 노벨화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인에 대한 차별도, 해방 이후 혼란스러웠던 당시 상황도 이태규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1973년 한국과학원(KAIST의 전신) 명예교수로 영구 귀국한 이후 20년 동안 70편에 가까운 논문을 발표하는 등 평생 연구활동을 계속해 학자의 삶을 몸소 실천한 위대한 과학자이자 참 스승으로 오래 기억되고 있습니다.
-참고 서적: 나는 과학자이다(대한 화학회)
-참고 자료: 국가기록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