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장교동 한화빌딩 앞에는 한화기, 태극기와 아울러 그리스 국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습니다. 한화빌딩에 그리스 대사관이 있기 때문이지요. ‘출퇴근하며 무심코 봐왔던 그리스 국기가 결국 지난 회에 이어 이번에도 그리스 작가의 고전을 다루게 한 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드네요.
이번에는 그리스가 낳은 위대한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 1883~1955)의 ‘그리스인 조르바’(1946년 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위대한 작가라고 평가됩니다만, 대중들에게 친숙한 작가는 아닌 듯 합니다. 하지만 두 차례나 노벨 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다고 해요. 그의 묘비명은 다음과 같이 달랑 세 줄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그는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가지 자유를 갈망했고, 그의 많은 작품 속에 자유 정신이 녹아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났는데요. 당시 터키의 지배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만큼 자유의 소중함이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 자유로운 삶의 궁극의 캐릭터가 바로 ‘조르바(Zorba)’입니다.
조르바는 자유와 야성의 결정체로서 머리가 아닌 육체로 생각하는(?) 아주 독특한 인물입니다. 이야기는 그리스 남부의 항구 도시 피레에프스의 한 카페에서 주인공 ‘나’와 조르바의 만남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 ‘나’는 원래 인텔리 작가인데, 크레타 섬에 갈탄 채굴 사업을 재개하고자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조르바와 운명적으로 조우합니다. 조르바는 다짜고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합니다. 채광일을 해보았다면서 말이죠. 주인공 ‘나’는 조르바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조르바의 묘한 매력에 이끌려 함께 가기로 합니다. 이들 두 주인공이 크레타 섬에서 갈탄 채굴, 삼림 벌채 사업을 벌이고 그 과정에서 동네 여인들과 사랑을 나누고, 치정에 의한 마을 사람들의 자살과 살인을 겪고, 결국은 사업도 모두 망하게 된다는 것이 스토리의 근간입니다.
스토리 라인만 본다면 그렇게 매력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어요. 이 소설의 핵심은 바로 조르바의 자유, 야성, 진정한 사랑, 인생에 대한 극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촌철살인 대사들입니다. 조르바는 주인공 ‘나’를 ‘두목(boss)’라고 부르며, 주인공 ‘나’의 자유로운 인간이 못됨을 일깨워줍니다. 예를 들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이런 대화를 나눕니다.
- 나: 무슨 일을 하십니까?
- 조르바: 닥치는 대로 하죠. 발로도 하고 손으로도 하고 머리로도 하고… 하지만 해본 일만 해가지고서야 어디 성이 차겠소?
한번은 왼쪽 새끼 손가락이 없는 것을 보고 조르바에게 그 연유를 묻자 조르바가 이렇게 답합니다.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손 새끼 손가락이 자꾸 거치적거리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도끼로 내리쳐 잘라 버렸어요.”
이런 거친 조르바에게도 소녀 이상의 독특한 감수성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합니다. 이런 말을 해요.
“두목, 돌과 비와 꽃이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우리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일 거예요. 두목, 언제면 우가 귀가 뚫릴까요! 언제면 우리가 팔을 벌리고 만물(돌, 비, 꽃, 그리고 사람들)을 안을 수 있을까요? 두목, 어떻게 생각해요? 당신이 읽는 책에는 뭐라고 쓰여 있습니까?”
이런 수 많은 조르바의 명대사들은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망각하고 속박의 구렁텅이로 향하는 우리시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것 같습니다. 더욱 독특한 것은 조르바의 산투르(santur)라는 타현(打絃)악기를 분신처럼 갖고 다니면서 연주하기를 즐깁니다. 조르바의 산투르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조르바: 산투르를 다룰 줄 알게되면서 나는 전혀 딴사람이 되었어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나 빈털터리가 될 때는 산투르를 칩니다. 그러면 기운이 생기지요. 내가 산투르를 칠 때는 당신이 말을 걸어도 좋습니다만, 내게 들리지는 않아요. 들린다고 해도 대답을 못 해요.”
- 나: 그 이유가 무엇이지요, 조르바?”
- 조르바: 이런, 모르시는군.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바로 그게 정열이라는 것이지요.”
조르바가 인간에 대한 생각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대목이 있습니다.
- 조르바: (중략)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데 윽박지르면 그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 나: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 조르바: 자유라는 거지!
이런 촌철살인 대화는 소설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노라면, 조르바가 나약한 나 자신에게 말하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더군요. 조르바의 대사는 인간 본연의 자유의 추구 원초적인 인간 본성의 추구의 중요성을 정제되지 않은 거친 조르바의 음성으로 전해줍니다.
영화 ‘그리스인 조르바(Zorba The Greek, 1964)’에서는 앤서니 퀸(Anthony Quinn)이 열연했는데요. 소설 속의 조르바가 현신한 듯 했습니다. 원작 소설의 방대한 대화를 압축하고 기본 스토리 라인을 따라 물 흐르듯이 전개됩니다. 단연 압권은 마지막 부분입니다.
조르바가 사랑했던 부블리나도 세상을 떠나고, 주인공 ‘나’가 사랑에 빠졌던 과부도 마을 사람에게 살해 당한 후, 조르바의 마지막 숙원 사업이었던 산림 벌채 사업이 벌목 이송 설비 기동식에 두 사람이 참석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작동으로 막대한 자금이 들어 간 설비 전체가 망가집니다.
- 조르바 : (껄껄 웃으며) 저것보다 더 멋있게 무너지는 것 본 적 있어요?
역시 조르바답습니다. 참석했던 마을의 수도승들, 마을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조르바와 단 둘이 남게 된 ‘나’. 난데없이 조르바에게 전에 조르바가 췄던 춤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조르바가 깜짝 놀라죠. 이제 ‘나’도 조르바가 되어가는 걸까요? 둘이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막이 내려갑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조르바가 ‘나’에게 던진 인상적인 대사가 있었습니다.
“당신은 한 가지만 빼고는 다 갖췄어요. 광기. 사람이라면 약간의 광기가 필요해요, 그렇지 않으면, 감히 자신을 묶는 로프를 잘라내어 자유로워질 엄두를 내지 못해요.”
문득 언어의 유희처럼 들렸던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라는 뜻의 출처를 알 수 없는 한자성어인 “不狂不及(불광불급)”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게 자문하게 되더군요.
“과연 우리는 열정을 갖고, 기존의 굴레를 벋어나 인간 본연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제가 이 책을 10대나 20대 때 읽었다면, 지금보다는 더욱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고전의 위대한 힘을 새삼 느꼈습니다. 아울러, 내 가슴 속에 잠자고 있었던 조르바를 조금이나마 깨울 수 있는 의미 있는 기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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