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또 하루가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정신 없이 하루를 보내고 퇴근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 허전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는 게 재미없다, 입버릇처럼 되뇌며 일상이 권태롭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일을 하다가도, 식사를 하다가도, 거리를 걷다가도 그저 진부하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 아우슈비츠를 경험한 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수용소에 들어온 후부터 언제 가스실로 보내져서 죽게 될 지 모르는 상황에 처해졌습니다. 이미 90%가 입소 당시 가스실로 보내져 죽었기 때문에 죽음은 바로 코 앞에 있었습니다. 충격적이고 부인하고 싶은 상황이었습니다.
극심한 영양 실조에 시달리며 익숙하지 않는 노동을 하면서 지방층은 말라가고 근육마저 소비되어 피골이 상접해집니다. 넝마를 걸치고 때로는 오물을 뒤집어써도 닦지 않고 묵묵히 일해야 합니다. 멈칫하는 순간 주먹이, 발길이 날아오며 욕을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처참한 상황에도 무감각해집니다. 두 시간 전에 같이 이야기했던 사람이 시체로 끌려가는 것을 목격할 때도 그저 흘깃 바라본 후 먹고 있었던 수프를 마저 맛있게 먹고, 어린 소년의 동상에 걸린 살을 도려내는 것을 볼 때도 아무런 느낌이 나지 않습니다. 주변엔 시체와 시체가 넘쳐흐르기 때문입니다.
☞ 2차 세계대전과 유대인에 대한 극한 상황을 희망으로 이겨낸 영화
(좌)인생은 아름다워 1997 (중간) 제이콥의 거짓말 1999 (우) 피아니스트 2002
그러던 어느 날, 삼엄한 감시 속에서 무리지어 얼음 같은 거리를 걷다 문득 아내를 떠올렸습니다.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그녀의 얼굴, 목소리, 추억을 하나씩 떠올리다가 그녀와 마음으로 대화를 나눕니다.
“그 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 말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기서 말한 그 의사는 아우슈비츠 경험을 바탕으로 의미치료를 창시한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입니다.
그는 어떤 극한 상황이라도 사람은 자신을 그 상황 속에 처해있는 자신과 분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자기가 원하는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즉, 차가운 거리를 걷고 있는 자신과 분리되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태도를 견지할 수 있습니다. 어렵고 복잡한 일을 할 때도 일을 하는 자신과 분리하여 사랑하는 이를 위해 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이 일로 인한 성취를 마음 속에 그려볼 수도 있으며, 한 단계 성장할 자신을 기대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상황”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발견한 “의미”입니다.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상실한 사람은 실존적 공허감과 좌절감에 빠진다고 합니다. 공허함, 권태감, 무감각을 느끼며 때로는 우울해지고 중독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시련 속에서도, 죽음 속에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또한 의미는 획일적인 게 아니라 개인마다 독특한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고유한 의미 찾기에 대하여 다소 추상적이지만 다음의 빅터 프랭클의 조언을 참고 삼기 바랍니다.
“나는 내 인생에게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라고 한탄하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해준다고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합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여진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삶의 의미는 “자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라 구체적인 현실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바른 태도와 행동”을 탐색하는 것입니다. 가령 데드라인에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은 한적하고 쾌적한 휴가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데드라인을 준수함으로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이나 주변에 기여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으며 데드라인 준수를 위해 같이 애쓰는 동료들과의 찐한 공감대에 “의미”를 둘 수도 있겠지요.
선뜻 쉽지는 않고 거부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일상 속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는 우리를 공허감에서, 권태감에서 해방시켜주는 단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더 나아가 이 세상을 열정적으로 살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