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10월이 되면 노벨상 수상자 발표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됩니다. 노벨상은 1901년에 시작해 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세계적으로 권위 있는 상(賞)이며, 노벨물리학상, 노벨화학상, 노벨생리·의학상, 노벨문학상, 노벨평화상, 노벨경제학상 등 6개 분야로, 업적을 남긴 개인이나 단체에 수여됩니다.
올해는 우리나라 소설가 한강이 한국 첫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국내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으며, 한국인이 노벨상을 수상한 건 2000년 평화상을 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입니다.
노벨상 수상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국가적으로도 큰 업적으로 여겨집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그 위상과 권위가 100년 이상 유지하고 있는 노벨상은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노벨상을 탄생시킨 노벨은 과연 어떤 인물이고, 노벨상 탄생에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호기심 많은 5개 국어 언어천재
1833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알프레드 노벨은 발명가인 아버지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발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적 호기심이 많았던 그는 아버지로부터 공학의 기초를 배웠으며, 러시아에서 폭탄 제조 사업으로 성공을 거둔 아버지는 4형제 모두 가업을 이을 과학기술자로 키우기 위해 과학뿐만 아니라 언어와 인문교육에도 신경 썼습니다.
16세에 이미 유능한 화학자로 인정받았던 그는 모국어인 스웨덴어 외에 러시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까지 능숙해 언어 천재로 불렸습니다. 또한 책을 읽는 것을 즐겼는데 직접 시와 수필, 희곡 등 문학작품을 창작하기도 했습니다.
인생의 터닝포인트, ‘니트로글리세린’을 만나다
노벨이 18세가 되던 1851년, 크림전쟁이 발발해 러시아가 오스만제국과 영국 프랑스 연합군에 패배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러시아 정부와 맺은 아버지 사업 계약들이 취소되었고, 러시아를 떠나 파리로 건너가 이탈리아인 화학자 펠루즈 교수 조수로 일하게 됩니다.
펠루즈 교수와 연구를 하며 ‘니트로글리세린(NTG)’에 대해 알게 됐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인생에 전환점을 안겨주게 됩니다. 몇 년 전 다른 제자는 니트로글리세린이 폭발성이 너무 커서 다루기 불가능하다며 연구를 포기했지만, 노벨은 정반대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폭발물을 만들다
노벨은 니트로글리세린이 기존 화학들에 비해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만큼 이를 안전하게 다룰 방법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렇게 1863년, 스웨덴으로 돌아와 니트로글리세린을 안정적인 규조토와 혼합해 위험성을 줄이는 방법을 개발하였는데요. 이를 통해 그는 위험한 물질을 보다 안전하게 취급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하였고, 폭약과 충분한 거리를 두고 폭발시키는 점화장치도 개발하여 특허를 받아 상품화했습니다. ‘노벨의 안전 파우더’라 불린 이 상품은 스웨덴 외에 노르웨이, 독일, 미국 등으로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니트로글리세린은 여전히 운반과 취급 시 폭발 위험이 높은 물질이었고, 공장 내에서 여러 차례 사고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다 1864년, 스톡홀름의 공장에서 대규모 폭발 사고가 발생합니다. 이 사고로 노벨의 남동생과 여러 명의 직원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는 그에게 심각한 충격을 주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비극에도 불구하고 노벨은 안전성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연구를 계속해 나아갔습니다.
산업화를 위해 발명된 다이너마이트?
니트로글리세린은 그 자체로도 매우 불안정한 화합물로, 충격이나 진동에 민감하여 운반 및 취급 중에 폭발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벨은 1866년 다양한 실험을 통해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와 같은 흡수성 물질에 스며들게 함으로써 안정성을 크게 향상시키는 방법을 발견했고,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다이너마이트’입니다.
다이너마이트는 출시되자마자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는데요. 주로 광산, 도로 건설, 터널 공사, 철도 건설, 굴착공사 및 수로 발파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되었고, 이를 응용해 도로, 항만, 광산 등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습니다. 특히 다이너마이트는 기존의 발파 기술에 비해 효율성과 안전성을 높여주어 건설 산업의 혁신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지만 강력한 폭발력을 지닌 다이너마이트는 동시에 무서운 무기가 되어 군사적 목적으로도 사용되었으며,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중에는 프로이센군이 프랑스를 공격하는 데 대량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다이너마이트는 전투의 양상을 변화시키는 무기가 되었고, 그 후의 군사 전략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쟁을 없앨 강력한 폭탄을 연구하다
노벨은 전쟁을 없앨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폭발물을 개발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각국이 강력한 폭발물의 무기를 보유하게 되면, 누구도 감히 전쟁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욱 강력한 폭탄을 개발하기 위한 실험을 계속했으며, 이 과정에서 니트로글리세린 용액과 니트로셀룰로오스를 혼합하여 일반 다이너마이트보다 폭발력이 더 강한 물질을 발견하게 됩니다.
1887년, 최초의 니트로글리세린 기반 무연화약이자, 코르다이트 폭약의 전신인 ‘발리스타이트(Ballistite)’를 개발한 그는 “이렇게 강력한 무기를 만들었으니 서로 전쟁할 엄두를 못 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것은 큰 착각이었죠.
발리스타이트는 소총, 대포, 지뢰, 폭탄 등 다양한 무기에 사용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유럽, 미국, 아시아 일본 등 여러 분쟁 지역에서 수많은 인명 피해를 초래하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노벨의 의도와는 달리, 그의 발명품은 전쟁의 파괴력을 더욱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그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상황을 초래했습니다.
죽음의 상인 ‘노벨’, 노벨상을 제정하다
노벨은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됐지만, 이 과정에서 형제를 잃었으며, 다이너마이트가 전쟁에 사용되면서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그는 ‘죽음의 상인’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얻었습니다.
자신의 연구 결과가 인류를 위해 긍정적으로 사용되기를 간절히 바랐던 그는, 1895년 ‘인류 복지에 가장 구체적으로 이바지한 사람에게 시상하도록’ 전 재산을 사회에 남긴다는 유서를 작성합니다.
1900년 노벨재단과 노벨상위원회가 설립되고, 1901년 12월 10일, 알프레드 노벨의 다섯 번째 기일에 첫 번째 노벨상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전쟁에 사용되는 강력한 폭탄을 발명한 그가 전 재산을 바쳐 인류에 기여하는 업적에 상을 수여하는 재단을 만든 것은 역설적이면서도 모순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 세계 평화와 과학의 발전을 얼마나 간절하게 바랬는지 알 수 있습니다.
과학과 인류애의 조화로운 발전을 추구하는 지속적인 노력의 일환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고 있는 노벨상. 노벨상이 수여될 때마다 그의 비전과 꿈이 계속해서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라며, 이 안에는 그 누구보다 세계 평화를 갈망했던 알프레드 노벨의 염원이 담겨 있다는 것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