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케미칼 북 마스터 추천도서 ④
학창시절 국어 시간에 시를 배울 때면 늘 불만이었던 게 해석을 강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불러주시는 대로 빨간 줄 쫙쫙 쳐가며 해설과 의미를 빼곡히 적어 놓은 책을 보면 내심 못마땅했지만 시험을 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인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를 멀리했어요. 그렇다고 원래 시를 좋아했던 것도 아니었지만요.
함민복의 시를 접한 건 5~6년 전쯤 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책 선물을 할 일이 있어 퇴근길에 서점에 들렀는데, 도통 눈이 가는 책이 없었어요. 받을 사람의 취향을 잘 몰라 고민하다가 무난한 에세이나 수필집 같은 걸 사기로 했는데, 우연히 제목이 눈에 띄어 <미안한 마음>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하나 둘 책장을 넘기다 발견한 시가 ‘긍정적인 밥’이었는데요, 선물하려고 샀다가 결국 제가 가졌습니다 ^^
긍정적인 밥
시 한편에 삼만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시를 쓰고 시집을 내서 받는 돈이 언뜻 작아 보이지만 누군가의 따듯한 밥이 되고, 국밥 한 그릇이 되고, 바다를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이 된다는 성찰을 담고 있습니다. 따뜻한 밥이 생각나네요. 시인 함민복이 걸어온 길을 보면 시가 더 가깝게 다가옵니다.
충청도 산골 출신 그는 공고를 졸업하고 경주의 발전소에서 근무를 하다가 시를 쓰고 싶은 생각에 늦은 나이에 대학에 진학해 문예창작을 공부했답니다. 도시에서 친구 집과 월셋방을 전전하며 가난하게 살다가 우연한 기회에 강화도 외진 곳에 정착해 혼자 살고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노모를 모시지 못 했고, 형제들 중 혼자 대학 가는 것을 미안해할 정도였대요. 시인이 되고서도 그가 만져 본 가장 큰 돈이 2백만 원이었다고 해요. 그러나 가난을 불편해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는 그입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시를 쓰게 하는 자양분인 셈이죠.
작가 김훈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라면과 소시지를 장만해서 민복이네 집에 몇 번 놀러 갔었다.
부탄가스도 사다 주었다.
나는 민복이가 우리나라의 중요한 시인이라는 것을 아는데,
민복이는 이걸 전혀 모른다.
…(중략)…
가난과 불우가 그의 생애를 마구 짓밟고 지나가도 그는 몸을 다 내주면서 뒤통수를 긁고 있다.
그는 세상을 버리지 못하는 은자(隱者)이고, 숨어서 내다보는 견자(見者)이다
시이건, 산문이건 함민복의 글은 특별한 형식 없이 하나의 일기처럼 쭉 펼쳐져 있습니다.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것만으로 정갈하게 채워져 있는데요, 때로는 어린 날을 추억하기도 하고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 강화도에서의 소박한 일상 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의 글을 관통하는 몇 가지 키워드는 어머니, 밥, 가난, 자연입니다.
함민복의 글은 작은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못 가져서 불평 불만들로 채워지는 제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따지고 보면 저의 모든 일상에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 것 투성이인데 말이에요. 그의 산문집 <눈물은 왜 짠가>는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작품이기도 하며 책의 표제이기도 합니다.
눈물은 왜 짠가
지난 여름이었습니다 가세가 기울어 갈 곳이 없어진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 드릴 때의 일입니다 어머니는 차 시간도 있고 하니까 요기를 하고 가자시며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한평생 중이염을 앓아 고기만 드시면 귀에서 고름이 나오곤 했습니다 그런 어머니가 나를 위해 고깃국을 먹으러 가자고 하시는 마음을 읽자 어머니 이마의 주름살이 더 깊게 보였습니다 설렁탕집에 들어가 물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았습니다 “더울 때일수록 고기를 먹어야 더위를 안 먹는다 고기를 먹어야 하는데…… 고깃국물이라도 되게 먹어 둬라" 설렁탕에 다대기를 풀어 한 댓 숟가락 국물을 떠먹었을 때였습니다 어머니가 주인아저씨를 불렀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뭐 잘못된 게 있나 싶었던지 고개를 앞으로 빼고 의아해하며 다가왔습니다 어머니는 설렁탕에 소금을 너무 많이 풀어 짜서 그런다며 국물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주인아저씨는 흔쾌히 국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주인아저씨가 안 보고 있다 싶어지자 내 투가리에 국물을 부어주셨습니다 나는 당황하여 주인아저씨를 흘금거리며 국물을 더 받았습니다 주인아저씨는 넌지시 우리 모자의 행동을 보고 애써 시선을 외면해 주는 게 역력했습니다 나는 그만 국물을 따르시라고 내 투가리로 어머니 투가리를 툭, 부딪쳤습니다 순간 투가리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왜 그렇게 서럽게 들리던지 나는 울컥 치받치는 감정을 억제하려고 설렁탕에 만 밥과 깍두기를 마구 씹어댔습니다 그러자 주인아저씨는 우리 모자가 미안한 마음 안 느끼게 조심, 다가와 성냥갑만한 깍두기 한 접시를 놓고 돌아서는 거였습니다 일순, 나는 참고 있던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습니다 나는 얼른 이마에 흐른 땀을 훔쳐내려 눈물을 땀인 양 만들어 놓고 나서, 아주 천천히 물수건으로 눈동자에서 난 땀을 씻어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눈물은 왜 짠가'
마침표도 문단 구분도 없는 희한한 글…. 저는 이 글을 마침 없이 단숨에 읽어 내려갔고, 머릿속에 한편의 짧은 동화와도 같은 영상이 그려졌습니다. 함민복의 글은 쉽게 읽어지지만 쉽게 읽혀지지 않고, 그래서 두 번, 세 번 읽게 됩니다. <눈물은 왜 짠가>에 실린 또 다른 글 ‘성구 파이팅!’입니다.
성구 파이팅!
엉뚱한 짓을 잘하는 조카가 있다.
“너 커서 뭐 해먹을래?”
“김치”
“그런 것 말고”
“그럼 된장국, 감자, 파…”
“아니, 그런 것 말고라니까…”
“그럼, 멸치.”
조카 성구에게 물어본 것은 반찬이 아니라 장래희망이었다. 내가 못내 가슴 아팠던 것은 성구의 대답에 그 또래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돈가스, 햄버거 같은 육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고향을 떠나 어렵게 살고 있는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에 맘이 저렸다. 세월이 흘러 성구가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였다. 집으로 돌아오던 나는 발길을 멈추었다. 오층 건물에서 성구 친구가 종이 비행기를 날리고, 성구는 길바닥에서 불규칙하게 방향을 바꾸며 떨어지는 비행기를 땅에 닿기 전에 받으려 하고 있었다. “성구야, 너 차에 치이면 어쩌려고 큰 길에서 위험한 장난을 하니? 집에 가서 놀아라.” “삼촌 우리 지하실 방에서는 비행기를 높이 날릴 수 없잖아.” 그날 숙제 안하고 놀기만 한다는 트집을 잡아 성구를 혼내고 나니 마음이 짠했다. 꿈속에서는 지하실 방에도 푸른 하늘이 펼쳐지는지, 비행기를 마음껏 날려보는지, 얼굴에 웃음 띠며 잠자던 성구.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어려운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친척집 농장으로 이사를 했다….(중략)…우루과이 라운드가 타결되고 농장이 망했다. 성구는 다시 부천시에 있는 외삼촌네 지하실 방으로 이사를 갔다. 성구야 네가 씨름선수가 되었다니 기쁘다. 삼촌은 네가 어두운 가족사를 극복하고 꼭 훌륭한 김치가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성구 파이팅!
함민복의 작품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백 마디 말보다 직접 보는 게 낫기 때문에 좀 길지만 그의 작품 세 편을 소개해드렸습니다. ‘긍정적인 밥’, ‘눈물은 왜 짠가’, ‘성구 파이팅!’ 모두 눈 앞에 하나의 장면이 펼쳐지지 않으세요? 함민복의 모든 글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쉽습니다. 어려운 단어, 추상적인 말들이 없어서 좋고, 그래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힙니다.
힘들고 지칠 때면 누군가가 나를 위로를 해주었으면 싶은 마음이 들죠. 그런데, 막상 누군가의 위로를 받았는데도 별반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누군가의 모습을 보고 스스로 위로를 받고 마음을 잡는 경우가 있는데, 저에게는 함민복의 글이 그렇습니다. 그의 글은 지친 몸을 이끌고 집에 갔을 때 어머니께서 내어주시는 따듯한 밥 같습니다. 그 만한 위로가 또 있을까요? 마지막으로 함민복의 작품에 대한 소설가 박민규의 서평으로 마무리합니다.
이 순간 지구에서 할 수 는 근사한 몇 가지 일은 다음과 같다. 파리 라세느에서 샤또 마고를 곁들인 오리요리를 먹는 것, 그리스 산토리니의 해안에서 지중해의 풍광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 인도 바라나시의 들판에 누워 밤하늘을 보며 잠드는 것, 오스트리아 국립극장에서 비엔나 필이 연주하는 모짜르트를 듣는 것, 몰디브의 푸른 물속에 자신의 전부를 담그는 것. 삿뽀로의 폭설을 지켜보며 북해도 대게를 맛보는 것. 그리고 돌아와 함민복의 시를 읽는 것이다. 이 중 한가지를 고르라면 나는 주저 없이 ‘함민복을 읽는 일’을 선택할 것이다. 가장 근사한 일이란, 모쪼록 그런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지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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